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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인의 의식구조, 2001」을 읽고 ②完

해랑(Sea-wave) 2024. 11. 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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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인들은 서양인들과 다르다. 행복한 상태에 대한 의식이나 감정이 극도로 희미해져 있으며 행복을 꺼리는 습성이 체질화돼 있다.

이러한 한국인의 의식 구조는 행복은 위험하다는 사고방식, 행복은 허무하다는 사고방식, 불행은 옹호돼야 한다는 사고방식으로 나누어 생각해보자.

 

진취적이고 정면적이며 외향적인 서향인은 넓은 외계를 향해 보다 큰 것을 찾아 나선다. 곧 2보다 3이 크고 3보다는 4가 크다는 것을 그들이 개척하는 넓은 시야에서 체험하고 인식하는 것이다.

 

그런데 퇴영적이고 배면적이며 내향적인 한국인은 자꾸만 좁아지는 시야에서 3보다 작은 2, 그보다 작은 1 하는 식으로 보다 작은 규모의 물질이나 욕망에 잘 참고 견디게끔 적응이 돼 내려왔다.

 

한국인 교수가 학생의 신상을 걱정해 주는 것은 상대방의 동심원 깊숙이 제2영역, 제3영역까지 침투하는 행위로 한국인에게 너무나 자연스러운 의식의 작동이다. 그러나 자기 동심원으로의 침투를 완강히 거부하는 미국인은 이 걱정을 일종의 상행위나 침해행위로 인식하는 것이다.

 

한국인은 의식 구조상 허물이라는 것을 좋아하지 않으며, 가급적 허물 없이 지내려고 노력한다. (이해와 타산을 넘으려고 한다.)

인정은 독립적 인간 관계가 아니라 의존적 인간관계이며, 그 바탕에는 응석이 깔려있다.

 

원망한다는 감정은 피의존체에 응석이 잘 받아들여지지 않을때 발생하는 것이다.

그러기에 독립적 인간끼리 '기브 앤드 테이크' 관계처럼 마음의 보수를 할 필요 없다.

한국인은 인격에까지도 완전의식을 투사하여 티끌만한 흠만 있어도 인격을 부정하는 전인격적인 형식주의를 지니고 있는 것이다. 19세에 불문을 접한 율곡을 비난한 사람들은 'all or nothing'의 사고를 인격에 투사한 것이다.

한국인은 경제 · 사회 모든 분야에서 어떤 상황을 지속하기보다는 변화된 상황에 따라 동화하는 성향이 짙다. 서구의 어느 나라에 가보더라도 가업이 후손 대대로 전승되는 것은 일반적이다.

 

그러기에 서구인들은 자기를 소개할 때는 4대째 우편 배달을 한다든지 5대째 야채상을 한다든지 하는 말을 자주한다. 이웃 일본만 하더라도 몇 대째 가업이 전승되는 것은 흔한일이다. 그런데 한국에서는 농사나 어업을 제외하면 2대는 커녕 평생 1대를 지속하는 경우도 드물다.

 

강한 극기에 가치를 두었던 선비사상은 쉽게 변심하는 한국인의 의식구조에 제동을 걸어왔지만 그것이 사라진 뒤부터는 지속성이나 일관성이 무시되어 왔다.

 

이것은 떨어질 것을 예상하는 눈(비전)의 행동이 아니라 위험부담을 안고도 덤비는 담의 행동이다.

눈앞의 미래를 십분 계산하는 서양인과 눈앞의 미래를 운명이나 요행에 맡기는 한국인의 의식구조 차이가 등반 행동을 전혀 달리해놓는 것이다.

 

상대방이 베푸는 친절마다 자기의 잘못으로 파악하는 한국인의 의식 구조는 겸손이라기보다는 그러지 않음으로써 상대방의 호의를 잊어버리지나 않을까 하는 조바심과 두려움에서 비롯되었다고 볼 수 있다.

 

자신을 독립체로 유지하지 않고 어떤 상대의 예속체로 유지하려면 상대방과 평등해서는 불가능하기에 자신을 비하하고 죄인시할 필요가 생길만하다.

 

천석꾼 2대를 못가고, 만석꾼 3대를 못간다는 말은 부의 소비에 있어서의 철저한 내향성 때문이다.

타산된 노력은 성과가 뻔하지만 정서적 인간 관계의 형성이 전제되면 타산되지 않은 노력이 배가의 성과를 가져올 수 있다는 것을 입증한 것이다.

 

공짜를 좋아하는 한국인의 성품

  • 첫째, 한국인은 한 군데 정착하고 살아온 농경민이다. 유목민은 즉석교환을 한다.
  • 둘째, 못사는 가문이 잘 사는 집안에 의지하는 것은 당연한 권리였다. 스스로의 생계의 무심하고 게을러도 살 수 있었던 그 오랜 체험이 공짜를 의식 속에 체질화시켰던 것이다.
  • 셋째, 자신을 독립적으로 파악하지 않고 상대적으로 파악하려는 한국인의 성향에서도 원인을 찾아볼 수 있다.

한국에서 가족 외적인 요인으로 결속하는 길드의식이 싹튼 것은 보부상이나 백정 · 물꾼 · 무당 같은 천대받은 계층인 데 비해, 일본에는 조닝 · 쇼쿠닝이라 하여 가족의 내적 결속보다 강한 가족 외적 결속이 크게 발달하였다.

한국인은 따로따로 보면 똑똑하고 유능하지만 뭉치면 약하다.

 

인정권이라는 집단 논리에는 개체를 희생하지만 밖에 나가면 집단 논리를 상실하고 개체논리를 완강하게 내세우는 것이다.

전쟁 상황이 위기에 처했을 때 노비를 해방시키는 방법으로 위기를 구하는 것은 지극히 한국적인 전술이라 할 것이다.

선천적 자격으로 얻었던 이름, 곧 씨족 · 가문 또는 노비 · 상민 · 중인 · 양반 · 사대부 등의 옛날 자격이 오늘날 출신 학교 · 소속 집단 또는 학력 · 직위 · 직책 · 블루칼라 · 화이트 칼라 · 고용주 · 피고용주 등의 후천적 자격으로 변질되었을 뿐이지, 그 자격에 붙어다니는 이름에 대한 집착은 달라지지 않았다.

미국 사람에게 신분을 물으면 기술자 · 공무원 · 신문기자 · 세일즈맨이라고 말하는 반면 한국인은 구체적인 실을 앞세우지 않고 그 실이 소속된 이름을 먼저 앞세운다.

우리 한국 사람은 저 사람이 무슨 일을 하는 사람인가보다는 어느 직장에 다니는 사람인가를 알고싶어한다.

 

이 같은 피부 접촉에 대한 관용은 바로 촉각형 의식 구조의 소산이 아닌가 싶다.

사막이나 유목 풍토에서는 인간으로 하여금 독립체로 성숙하지 않으면 살아갈 수 없게끔 풍토적 환경을 조성한다.

농경은 목축처럼 독립해서 지을 수 없기에 집단적인 인간관계가 성립된다.

 

이처럼 의존 성향 속에서 자라난 어린이는 일곱 살을 전후하여 의존체를 어머니로부터 친구로 옮겨간다.

 

이렇게 자란 한국인은 대학을 나와 직장에 들어가서도 의존적으로 귀속한다. 마치 어릴
때 어머니에게, 학생 때 선생님에게 의존하듯이 직장에 전인간적 · 전생애적 의존을 한다.

 

곧 독립체로서 계약에 의한 귀속이 아니라 나의 모든 인간적인 것까지 더불의 의존적으로 귀속한다. 이 같이 한국인의 일생에서 인간관계는 의존으로 일관되고 있으며, 이 의존은 한국인에게 특유한 의식 구조를 수반하게 했다.

 

서양인이 '행복하다'는 말을 즐겨 쓰는 가장 큰 이유는, 한국인에게 있어서 행복은 자신의 노력이 아니라 어떤 절대적인 힘에 의해 '되어지는 것'이라는 사고가 지배적인데 비해, 서양인은 행복이란 사람이 '창조해내는 것'으로 생각한다는 차이다.

 

그 개념은 바로 인생의 행 · 불행은 되어지는 것이라는 근본적 사고에서 비롯되었다.
이 행 · 불행의 유동적 연결성 때문에 한국인은 행복하다고 느끼는가 싶으면 어느새 불행을 염려한다.

 

유럽의 기후는 한국처럼 음식물을 부패시키지 않는 기후인 반면 한국의 기후는 순식간에 미생물이 번져 식품을 부패시켜 버린다.

외국에 가면 한식을 찾는 이유는, 외국 음식들이 발표를 겪지 않아 아미노산 맛이 없기 떄문이다.

 

중세 서구에서는 아이들을 친족이나 타인에게 맡겨 기르는 관습이 지배적이었다.

 

17,18세기의 서구 학교 교육제도는 아이들을 가족의 품으로 돌려보내는 결과를 초래했다.

서구의 아버지는 자식의 미래에 그 위엄을 투사한 데 비해 한국의 아버지는 가문의 명예 차원에서 그 위엄을 자식에게 투사하였다. 곧 인간 차원이 아니라 자식과 가문과의 연관 차원해서 엄했던 것이다.

한국의 촌락 공동체는 남의 눈에 거슬리지 않고, 남의 눈 밖에 나지 않으며, 또 남으로부터 손가락질 당하지 않는 인간을 가장 이상적인 인간상으로 여겼다.

 

양육이나 교육의 목적도 개인의 자질 계발이나 개성 능력의 조장, 창의력을 길러주는 차원에서 베풀어졌다기보다는 남의 눈에 거슬리지 않고 손가락질 당하지 않는 공동체의 평균적 인간 형성 차원에서 베풀어졌던 것이다.

 

계약 사회의 날카로운 칼날

  • 첫째, 퇴근 시간 이후에 남아서 일하는 잔업이란 게 거의 없다.
  • 둘째, 서구의 직장에서는 정해진 휴가를 자기 편의대로 아무때나 쉰다는 점
  • 셋째, 계약상 자기에게 주어진 직무 이외의 일은 하지 않는다.

'내 직무 이외의 말' 보다 '몇 번'이라는 창구 번호를 말해주는 것이 시간도 절약될텐데 자기가 맡은 일 이외에는 이토록 무자비하게 외면해 버린다.

 

미국에서 잠자리에 누워있는 새벽시간, 또는 아침식사 시간에 오는 전화는 아주 중요하거나 긴급한 상황을 알리는 전화로 인식되어 있다.

 

하루중 어떤 시간대인가가 미국인과 그들 사이에 전혀 다른 뜻을 갖고 있다는 사실을 이 미국인은 전혀 모르고 있었던 것이다.

커쿠닝 현상 : 개체가 차지하는 공간이 좁아질수록 개체간의 상호작용이 둔화되고, 움직이기보다는 맥을 잃고 가만히 있는 사람이 많아지는 활력 볼모 현상을 말한다.

 

공간이 좁아질수록 그 속에서 사는 개체는 점유 공간을 구분, 방위적이게 된다. 그리고 자신만의 방위 공간 속에 들어가 있음으로써 다른 개체에 무관심해진다. 개체는 자신의 공간속에 틀어박혀 다른 개체와의 관계를 차단한다.

 

시골에서 이러한 인간적 행동이 가능한 것은 타인을 인간으로 보고 있기 떄문이다. 전원에 둘러싸인 시골은 점유 공간이 넓기에 커쿠닝 현상의 역현상이 벌어지는 것이다. 이에 비해 도시에서는 타인을 하나의 물체로 본다.

 

닷새만에 서는 시골장은 우리 선조들에게는 생활 필수품의 교환현장이라기 보다는 밀집 공간에 젖고 싶은 욕구를 충족시켜주는 인력체 구실로서 뜻이 컸다.

 

그런데 모든 강산이 텅텅 빈채 손가락으로 꼽을 수 있는 몇 군데로만 사람이 몰려 바캉스 지옥을 이루고, 그 지옥속에서 자족한다.

날마다 새벽 달 보고 집을 나서 저녁 달 보고 돌아오는 농사일을 해온 한국인이었기에 아침과 점심은 늘 자연 속인 들판에서 먹는다.

한국의 도시나 고을이나 마을에는 광장이 없다. 둘러싸인 자연과의 관계가 주가 되고 보니 인간과 인간관계는 희박해 질 수 밖에 없다.

 

한국의 자연의 흐름은 들쑥날쑥 불안정한데 비해 유럽의 자연은 규칙적인 흐름에 따라 조용하게 변한다.

 

한국인 모두가 빨리빨리 달리고 있다. 그러나 시간을 벌기위해 빨리 움직이는 것은 아니다. 한국인의 긴박감은 몬순 기후 지대에 벼농사를 짓던 농경 민족으로서 필수적인 것이다.

 

세상은 아폴론적인 낮의 문화와 디오니소스적인 밤의 문화로 대별되는데, 한국은 아침의 문화권에 속한다. 하루 세 끼 가운데 아침밥의 분량이나 질이 제일 좋고 양이 많은 것도 이 때문이다. 그러나 유럽에서는 영국만이 아침밥의 비중이 클 뿐이고, 스페인 등지에서는 차만 마실 뿐이다.

 

촌락 공동체의 생리

 

공동체의 삶에 융화될 수 있는 평균인간을 지향했으며, 그와 같은 인간형을 이상적이라 생각했다. 그래서 유별나게 재능이 많거나, 유별나게 잘 되거나, 유별나게 고생하거나, 유별나게 인색하거나, 유별나게 사치스럽거나, 유별나게 고매하거나, 유별나게 타산적이거나, 유별나게 이치를 따지는 비평균 인간을 거부하고 싫어하며 배척한다.

누군가가 잘 되거나 잘 살게되면 거리감을 갖고 그것이 질투로, 질투가 모략과 헐뜯는 일로 곧잘 진전하는 이유도 바로 한국 촌락 공동체의 평균 인간 체질 때문이다. 모나지 않은 평균 인간으로서 공존하고 싶은데 누군가가 그 평균성을 깯리려하면 그의 발을 끌어내려 평균층에 있게 하려는 심리가 곧 시기와 질투로 발전하는 것이다.

예부터 한국인을 '독 속의 게'라고 비유하였다. 항아리 속에 많은 게를 넣어두면 제각기 항아리 벽을 타고 오르려한다. 그러나 한참동안 기어오르는 게를 다른 게가 붙들고 늘어져 밑으로 떨어뜨린다. 이 과정이 반복되어 결국 한마리도 기어나오지 못한다.

 

한국인의 집단 생활에서 '독 속의 게'와 같은 현상은 너무나 보편적이고 자연스럽다. 누군가가 어려워지거나 불행해지면 서로 잘 돕지만, 출세를 하거나 돈을 잘 벌거나 승진이 빠르거나 하면 뒤에서 흉을 본다.

 

한국 이민인들의 자립이 일본인들에 비해 30년이나 늦고 성공률도 15퍼센트에 불과한 이유가 이민 국가의 외적인 조건이 아니라 한국 이민자 사이의 내적인 갈등 때문이었다는 것은 이민 사회에서 이미 상식화된 일이다.

 

중동의 기업체 진출에도 한국 업체끼리 시기 · 질투 · 모략하는 바람에 일을 적지 않게 놓치거나 불리한 조건으로 맡을 수 밖에 없었던 것도 잘 알려진 사실이다.

 

식사나 생활에 적정한 칼로리의 양이 필요하듯 학교 교육 또한 졸업에 필요한 적정한 단위의 획득인 것이다.

 

비빔밥식 교육 : 그 중 어느 하나만 잘하거나 어느 하나만을 못해도 교육적 평가는 낮아질 수 밖에 없다.

 

어떤 문화권에 살건 갈등 때문에 형성된 정신적 긴장을 가지고 살아야 하기에 우리나라 나름의 해소 방법이 있다. 그것은 바로 갈등 요인을 만든 상대가 없을 때 그 사람을 헐뜯는 험담이다.

 

그러나 이처럼 한국인은 험담을 함으로써 험담 대상과의 사이에 형성된 긴장을 풀기 때문에 굳이 풍선을 터뜨리지 않아도 된다.

 

'그 사람이 너에 대해 이렇게 험담을 했으니 주의 하라'

  • 한국에서는 밀고로 여겨진다.
  • 미국에서는 통고로서 미덕으로 여겨진다.

'다른 사람에게 처지지 마라', '차를 놓치지 마라'는 것은 절대 지상의 가치로서 사람들을 지배하고 이성을 마비시키며 개성과 창조를 좀먹고 맹목적이게 한다.

 

길바닥에서 서두르는 정도는 해로울 게 없다. 그러나 이 차를 놓치지 말아야 한다는 본질이 추렛나 진급이나 교육에 투영되면 그 의미는 커진다.

 

미국에서는 사회적 약자가 어디까지나 공존자이지 동정받는 소외자가 아니다.

 

영국에서는 가게는 물건을 파는 곳이라는 개념외에 일종의 사교장이라는 이미지가 강하다. 값이 싸다는 이유로 단골 가게를 바꿀 수 없고, 소매상들의 경쟁이나 도태가 있을 수 없으며 아무런 충돌 없이 공존한다. 피자나 빵집들도 매일 정해진 분량 이상은 굽지 않는다.

 

한국 사람 같으면 누구나 배신감을 느낄 것이다. 그 같은 감정적 경지를 한국인들은 '정떨어진다'라고 말한다.

정이라는 것은 비타산성에서 양성반응을 보이며 비타산성에만 기생한다. 따라서 타산성은 살균제다.

 

'정 감각 흉 감각'이라는 말도 있듯, 성격과 언행 측면에서 결점이 많더라도 비타산점만 유지되면 그 결점들이 정에 저촉되는 법이 없다.

 

사회가 1년에 요구하는 인재는 국한돼 있는데 그 국한된 '사회'를 위해 1년이면 몇만 배의 인력이 배출된다.

 

남보다 앞서야만 내가 선택되는 겹치지 경쟁 사회의 생리때문에 남이 잘못되기를 바라는 악성 의식이 자리잡게 된다. 물에 빠진 자에게 구원의 손을 내미는 인간이 아니라 물에 빠진 자의 손을 뿌리치는 인간이 돼 가고 있다.

비단 시험공부가 끝난 후에도 공부는 무엇인가를 얻기위한 수단이라고 생각하게 된다.

 

경쟁력 · 학력 사회는 타인 지향성과 야합하여 그 성향을 더욱 강하게 하고 있다.

 

흔히들 요즈음 청소년 사이에 무기력, 무관심, 무책임, 무감동의 사무주의를 말한다.

 

서양의 문화는 꽃을 좋아하는 문화라는 점에서 공통점을 갖는다.

한국은 꽃을 아름답다는 관점이 아닌, 꽃이 지닌 격조와 절조에서 교훈적 의미를 찾으려고 했다.

 

약자로써 싸움에 임한다는 것은 곧 싸움을 말리는 제3자들을 의식한 것이다.

 

한국에서는 조정 기관이 개입하여 중재를 한다. 노사 협조라는 이름 아래 왕성하게 개입하여 타협 · 중재를 시킨다. 제3자가 나타나 균형을 잡는 것이다.

 

집 안에서 뿐만이 아니다. 과거 우리 선조들은 주막에서 전혀 낯선 손님끼리 한방, 한이불 아래 발을 뻗고 잘도 잤다.

한국 직장에서 개실을 갖는 사람은 국장 이상이나 이사 이상, 지점이면 지점장이 고작이다.

그러나 미국의 직장에서는 대체로 각방을 쓰며, 최소한 매니저 이상은 독립된 사무공간을 가진다.

 

JD: 입사때 계약한대로 그 기술서에 기록된 일만 하면 된다.
한국의 조직은 사람 중심이기에 대실주의가 가능하다.

역사적으로 한국인이 부자가 되는 경우란 예외 없이 매점 매석에 있었다.

 

개화기때 장안 거부로 손꼽혔던 상쾌도 바로 통좀 부자였다.

가장 큰 요인은 수요자들이 필요한물품을 미리 준비해 놓지 않는데 있다.

영국의 일레븐 테스트는 아이의 인생이 엘리트 코스를 밟느냐, 비엘리트 코스를 밟느냐를 판가름한다.

 

평등 사상이 가장 발달한 나라인 미국에서 계층 차별은 놀라울 정도이다. 상 · 하류의 계층간에는 거의 교류가 없으며, 사는 지역도 다르고 다니는 학교도 다르며 직업의 선택도 제한받는다.

 

독일 사회 역시
하층 계급 출신자가 학문적인 직업에 종사하는 것은 극히 예외에 속한다. 따라서 하층 계끕의 청소년들은 항상 노력하려 해도 그들의 성장을 가로막는 소시민적인자기 비하 의식과 결부되어 자기가 속한 계급 구조의 테두리에서 빠져나올 수 없다.

 

한국인에게 생명은 죽음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오, 죽음은 넋이 빠져나가는 것에 불과하고 육체는 보통의 물체일 수 없다.

 

한국인은 이렇듯 자학적 처리를 한다. 타산이나 보수나 금전 거래에 대한 불만을 자기 이익이나 권리를 완전히 포기함을써 표시한다.

 

불평등, 굴욕감, 소외감 등 정신적인 피해는 물질적인 피해보다 한결 크고 중대하게 생각하기 때문이다.
그들은 현실적인 자기보다 이상적인 자기를 살기 때문에 그렇다.

 

타율의식의 또다른 단점으로 어른이 되어서도 유아성을 벗어나지 못한다는 것이다. 한국인은 일단 집이나 마을의 경계를 떠나 공공의 경계에 들면 다른 사람이 시키는대로 움직이는 공공 유아가 된다.

 

유아에게 무엇보다 불안한 일은 혼자 남겨진다는 것이다.

 

이 타율적 인간은 누군가가 달리면 자기만 뒤떨어질세라 우선 달려놓고 본다.

 

한국인에게는 어떠한 희생을 무릅쓰고라도 가족간에 맺어진 보이지 않는 유대에 집착한다. 그것을 놓치면 무의식적인 불안을 느끼기 때문이다.

 

한국의 밥상은 먹는 사람의 욕구와는 상관없이 일방적으로 차려진다.
빨리 먹기 위한 방편으로도 유동식의 특성을 설명할 수 있다.
예부터 우리나라는 밥을 빨리 먹는 것이 예의였다.

 

밥을 짓는 연기는 한국인에게 부덕의 요소였기에 숨겨야만 했을 것이다.

이 같은 인간 극소화의 의식 작동은 비단 식생활뿐 아니라 주생활, 성생활, 인간 욕구면에서 골고루 나타나고 있다.

 

한국 집의 담이 외부로부터 내부를 차단하는데 비해 서양 집의 담은 경계 표시에 불과하여 누구나 넘나들 수 있듯이 인간층의 교류도 자유롭다.

한국인은 우리말을 한국어로 하지 않고 국어라고 표현하며 태양같이 각별하여, 그 둘레에 위성인 영어나 불어가 있다는 지극히 자기 중심적이고 주관적인 생각을 한다.

한국인이 내향 의식이 강하고 정착성이 강한 이유가 여기에 있다. 따라서 물리적으로나 사회적으로 밖으로 나간다는 것에 저항을 갖는다. 밖으로 내보내지는 존재란 항상 약한 입장에 놓여진 자이게 마련이다. 그렇기에 안에 남아있는 성원의 지위가 한결 높아지고, 밖에 나간 성원의 지위가 한결 낮아진다.

 

한국인은 모든 사물을 수직적 · 종적 · 서열적으로 파악하여, 같은 자격의 선반공이라도 입사 연차나 자격 취득 연한으로 차등을 둔다.

한국에서는 순수한 학문의 토론, 곧 서양에서 성행하는 세미나가 불가능 하다는 의견이 지배적이다.

서양의 어떤 집회에서도 이와 같은 현상을 찾을 수 없다.

 

동료끼리 있을 때는 이름을 부름으로써 차등이나 서열이 무시된 화목하고 긴장이 없는 동료의식속에서 일한다.

한국은 교수, 부교수, 조교수, 전임강사, 시간강사, 조교, 학생이라는 서열로 세분되어 수직적으로 맺어져 있다.

학생 사이에도 1학년, 2학년, 3학년이라는 서열 의식이 서구 어느나라보다 강하며, 학년이 성적이나 능력보다 항상 선행된다는 설정이 한국인의 강한 서열 의식을 입증해주고 있다.

 

한국의 체면을 서양 사람들의 명예와 혼동하는 것은 잘못이다.
우리는 너무 많은 체면의 자갈밭을 맨발로 걷고 있다.

여러 가지 척도에서 가치를 찾는 다치적 의식구조를 가지고 있는 서양인은 차선에도 만족하고, 또 차선이하의 척도에서도 만족할 줄 안다.

그러나 단치적 의식구조를 갖는 한국인은 '최고'에만 만족할 줄안다.

최고는 멀고도 힘들고 경쟁이 심해서 어렵기 때문에 꾸준히 최고를 향해 달리다가 인생을 마감하게 된다.

 

상향의식은 자기가 처해 있는 현실적인 척도보다 위에 있는 척도에 자기를 동일시시킨다.

지금 처지로는 중급 담배밖에 사 피울 수 없으면서도 무리해서 고급 담배를 사 피움으로써 환상적인 상향을 하는 단치적 의식구조는 많은 좌절을 초래한다.

 

한국인은 세상에서 드물게 많은 좌절과 패배감, 실망을 느끼는 민족이 돼 버렸다.

 

의식 구조상 자기 처지에 만족하고 그것을 더욱 풍요롭게 가꿔 나가는 다치적 의식구조가 부족하기 때문이다.

파스칼이 치통으로 괴로울떄는 다른 생활을 해서 잊는다고 했듯 고통의 보상이 횡적인 다른 가치에서 온다. 하지만 한국인은 종적으로 하향시켜 놓고서 스스로 위로한다. 이를테면 '내 팔자에 무슨', '아는 것이 병이지',' 가난이 상팔자' 등 소극적이고 자탄적으로 하향시킴으로써 보상한다.

 

이 같은 하향보상은 고통이나 비애를 보상하는 것이 아니라 억압되어 있어 점차적 상향을 노리는 탄력으로 가압을 한다.

일단 획득해 놓은 지위에서 상향은 못할망정 하향한다는 것은 죽음보다 싫어한다.

 

이런 하향 제동 의식이 한국인에게 특히 강한 것은 상향 의식구조의 소산이다.

한국인은 세상이 객관적으로 인정하는 실질적인 가치에는 무관심하고 자기 자신의 감상적이고 환상적인 상향 지향과 하향 제동의 가치에만 집착한다.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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