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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인의 의식구조, 2001」을 읽고 ①

해랑(Sea-wave) 2024. 11. 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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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 「한국인의 의식구조, 2001」을 읽고

작성일 : 2024-11-23

 

한국인에게는 단독 소유의 개념이 지극히 약했다.

 

서구의 가옥구조 처럼 철저히 차단된 나의 공간이 한국 집에는 용납되지 않는다.

 

먹는 풍속에서도 '나'가 '우리'속에 녹아드는 테두리에서 벗어나지 않는다.

 

사막에 사는 사람들은 가족보다 부족히 한결 더 소중하다.

 

사람은 제각기 삼각 잣대를 꾸준히 기어오른다.

  • 사회적 지위의 척도
  • 경제적 지위의 척도
  • 인격적 지위의 척도

서양인의 의식 구조는 세 변의 척도 균형을 잡을 줄 안다. 적당히 인격도 갖추고, 분에 맞게 사회적 지위도 확보하며, 경제적 지위도 누린다. 어느 하나를 위해 다른 두개를 희생하는 법이 없다.

 

조하리의 창 개념을 볼때, 사적 자기층은 미국인에 비해 한국인이 엄청나게 크고 공적 자기층은 한국인이 엄청나게 작다. 곧 한국인은 남에게 알리는 자기의 부분을 극소화하고, 남에게 알리지 않는 자기의 부분을 극대화함으로써 미국인과 크게 대조를 이룬다.

이와 같이 은폐적이고 폐쇄적인 한국인의 표현구조는 일상생활에서 다음과 같이 나타난다.

  • 첫째, 한국인은 더 소수의 사람들과 선택적으로 접촉을 한다.
  • 둘째, 정보 전달에 있어 그 전달 수단의 회로를 극소화하고 또 애매모호하게 한다. 이는 자기의 체험이나 의사, 주관적 견해를 가급적 남에게 드러내지 않게끔 억제하기 때문이다.

자식이 직장을 그만두었다고 했을 때 미국 부모들은 한국 부모들이 걱정하는 것에 10분의 1도 심각하게 생각하지 않는다.

 

미국의 경영자에게 기업은 더 많은 돈을 벌기 위한 수단이다.

 

우리라는 집단적 복수 호칭을 쓰는 이유는 직장이 집의 연장이요. 직장의 종업원이 가족의 연장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많은 경우 자기 집이나 가족이 숙명적인 공동체이듯, 자기 직장은 자기 사회적 존재의 전부이고, 전 생명이 의존하는 감정적인 요소가 된다.

 

부모가 자식을 직장에 맡길 때는 이제까지 부모가 담당했던 자식의 인간적 · 도덕적 · 인격적 책임도 아울러 기업주에게 의뢰하고 기대한다. 계약적 관계로 끝나지 않는다.

 

곧 경영자는 종업원에 대해 가족적 친밀감과 인격적인 육성, 인간적인 성숙까지 포괄해서 다스려야 한다.

 

가족이란 서로를 인간적으로 잘 알고 있는 사람들의 집단이다.


이 공개된 동질 집단이야말로 한국인의 의식 구조에 꼭 들어맞는 집단인 것이다.

 

한국인은 가족이라는 집단에 개체나 개인소멸을 가장 완벽하게 하는 독특한 민족이기 때문이다.

 

한국인의 호기심은 숨어 보는 문화 패턴에서 형성됨으로써 특징을 지니게 된다.

자신의 실력이나 장점은 물론 자기의 무능이나 단점이나 잘못한 것을 솔직히 노출시키는 사람들은 찾아보기 힘들다. 정치가며 경제인이며 학자도 마찬가지이다. 한국인은 남의 일에는 무척 자세히 알려들고 함부로 입에 올린다.

 

먼저, 식(食)이 차지하는 상대적 위치는 한결 낮아 영국형에 가깝다. '죽지 못해 먹는다'는 말도 있듯이 먹는 것은 아주 간단한 사무이며, 그 식사에 쾌락적인 가치를 끌어들인다는 데 한국인은 무관심할뿐 아니라 오히려 부도덕하게 여긴다.

 

식사 빈도에서도 현져하게 차이가 난다. 서양에서는 다섯 끼를 먹는 것이 관례이며, 중국에서도 보통 네 끼를 먹는다. 이 세상에서 드물게 두 끼를 먹는 민족이 바로 한국인 인 것이다.

한국인을 많이 접해본 외국인들은 흔히 한국인 개개인은 똑똑하고 유능하지만 모아 놓으면 무력하고 무능해진다고 말한다.

 

혈연 집단에 대한 한국인의 집단 의식은 이 세상에서 유래를 찾아볼 수 없을정도로 강하다.

곧 마을이라는 집단에 있어 이상적 인간상이란, 주색에 빠지지 않고, 남과 싸우지 않으며, 자신의 분을 알고 또 자신의 처지를 불평하지 않는, 정직하고 평범하게 땀흘려 일하는 그런 인간이었다. 또한 구성원이 같은 근로 형태와 목표를 갖기 때문에 개성적인 인간, 수완이 좋고 유별나게 재주가 많은 사람보다 오히려 평범하고 분수를 아는 인간, 집단의 규제에 불평불만을 갖거나 반대하는 인간보다 집단의 규율과 윤리를 잘 지키고 불평불만을 나타내지 않는 인간인 것이다.

근대화 · 공업화 · 도시화에 의한 사회 구조의 변화에도 한국인의 공동 정체성은 변함없이 오늘날까지 지속되고 있다.

 

한국인의 의식 구조에서 개체의 논리보다 집단의 논리에, 자율보다 타율의 성향이 더욱 두드러지게 되었다.

 

최선을 다하라(Do your best)라는 것을 들 수 있는데, 이 말 역시 그 말을 건네는 것으로 관계가 끝나는 그런 개체와 개체간의 말이다. 이에 비해 한국은 '이겨라'라는 말이 있다.

 

마을에서 형성된 집단 의식은 사라지지 않았다. 언젠가 마을과 같은 그런 '장'이 형성될 때 까지 늦춰졌다고 보는 편이 옳을 것이다.

자신의 일생을 귀속시킬 직장을 발견하게 되면 그 잠재돼 있던 집단 의식이 떠오른다.

 

한국인의 집단적 능력은 집단을 이루는 구성원 각자의 능력의 총화보다 커질 수 있다는 장점이 있다.

서양 사람은 직장에서 맡은 자신의 직무나 직책 이외의 일에는 무관심하다. 어떤 서양인도 직장에서 자신의 가족적 · 인간적 · 사회적 고민을 해소시키거나, 그런 인생 문제를 집단에 의존하여 해소하려 하지 않는다. 그러나 한국인은 잠재적 · 촌락적 집단 의식의 자용으로 신뢰할만한 상사와 동료에게 개인 신상이나 감정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무한히 의존하려고 한다.

 

한국인은 분명히 반대 의사를 표현할 때 '노'라고 말하지 않고 '예스'를 먼저 말한다

. '지당한 말씀이오만', '백 번 옳은 말씀입니다만', '저도 그렇게 생각합니다만' 등의 부정 전치사의 사용

 

자기 의사를 현명하게 은폐할 줄 아는 사람을, 옛 한국인은 지극히 이상적인 인간으로 우러러 보기도 했다.

네 말도 옳다는 황희 정승에 말은 완벽한 사적인 자기를 은폐하는 유형이다. 70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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